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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감독위원회는 ‘독립적인 금융기관 감독’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출범한 국내 최초의 통합 금융 감독 기구였다. 출범과 동시에 은행·기업의 구조조정을 총괄 지휘하게 된다. 1998년 4월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증권감독원 입구에서 열린 금융감독위원회 현판식에서 이헌재 초대 금감위원장(오른쪽)이 김종필 총리서리와 악수하고 있다. 왼쪽은 전철환 당시 한국은행 총재. [중앙포토]

    급한 불만 끄고 떠난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 시절 ‘지속 가능성’에 정책 초점을 맞춘 것도 그래서였다. 누가 맡아도 일정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 시쳇말로 ‘시스템화’를 노렸다. 예컨대 기업 구조조정을 은행에 맡긴 것도, 시장이 감시하게 하기 위해서다. 정권과 재벌 간 협상·타협이 불가능하도록 장치한 것이다.

    1998년 2월 말. 나는 비대위 일을 마치고 조세연구원에 돌아와 있었다. 그 즈음 조각(組閣) 얘기가 나올 때면 언론에 내 이름이 오르내렸다. 비대위에서의 활약과 ‘일을 참 잘한다’고 했다는 대통령의 평가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전해 듣는 청와대 분위기는 달랐다. 영 부정적이었다. “이회창 캠프 사람”이라며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기대 반, 체념 반의 며칠이 흘렀다.

    3월 7일.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카폰이 울렸다. 친구 녀석의 전화였다.

    “여어, 헌재야. 금융감독위원장이 됐네, 축하해.”

    방송 뉴스에 내정 발표가 났다는 것이다. 4월 1일자 인사였다. 장관급 인사가 이렇게 나나…. 귀띔도 통보도 없었다. 발표가 나고야 알게 된 것이다. 전날 마신 술도 다 깨지 않은 상태였다. 차를 돌려 조세연구원으로 갔다. 웅성웅성 기다리던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에 전화가 왔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 이윤재. 사촌 동생이다. 정부 인사로선 처음 내 임명 사실을 통보해줬다.

    “형, 4월 1일자 인사입니다. 어떻게 하실 거요.”

    “가능한 빨리 일을 시작해야지.”

    “은행감독원장과 증권감독원장이 공석인데, 그건 어떻게 할 거요.”

    은행감독원·증권감독원은 보험감독원·신용관리기금과 함께 이듬해 1월 금융감독원으로 통합이 예정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때다. 새로 인사를 내면 복잡해진다.

    “어차피 곧 통합할 텐데, 가능하면 내가 겸임을 하는 게 낫겠다.”

    전화를 끊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런 게 운명인가. 우연히 비상경제대책위원회에 발을 담그고, 급기야 장관급 공직까지 맡게 되다니. 한때 갈망하기도 했던 공직이다. 그런데 막상 내정 소식엔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때가 영 좋지 않았다. 이럴 때 나를 금감위원장에 임명한 게 무슨 뜻이겠는가. 비대위에서 입안했던 은행·기업 구조조정안을 직접 실행에 옮기라는 주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원성이 쏟아질 것이었다. ‘피비린내가 나겠구나. 사방이 적이 될 텐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아니면 내가 죽는다’.

    이때 떠오른 두려움을 나는 금감위 직원들에게 거르지 않고 전달했다. 4월 1일 취임식에서다.

    “사방이 적입니다.”

    나는 비유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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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조 개혁을 한다는 건 어항 속 금붕어가 되는 것입니다. 수족관이 아무리 커도 어항에 불과합니다. 돌이나 바위 속에 숨어 있으면 안 보일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밖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다 보입니다.”

    사심 없이 움직여라. 훗날 꼬투리 잡힐 일은 절대 하지 마라. 직원들을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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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대 능선을 걸어가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양쪽이 낭떠러지입니다. 어디로 떨어져도 죽습니다. 능선 위에선 모든 사람들에게 노출됩니다. 피아(彼我)가 없습니다.”

    지금 하는 일은 반드시 조사를 받는다.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추호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직원들 한 명, 한 명 손을 잡고 당부하고 싶었다. “목숨이 걸렸다. 제발 실수하지 말아달라”고 말이다.

    “모든 정치적·정책적 책임은 내가 집니다.”

    책임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업무에만 매달려달라는 뜻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하지 말아야 할 소리였다. 당시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위치가 못 됐다. 내 발언은 시장에 비장하게 전달됐다. 대변인실을 통해 기자실, 기자실을 통해 금융시장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금융기관장들이 이를 전해 듣고 내게 “무슨 의미냐”고 되묻기까지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시장은 금감위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사족(蛇足)

    금감위원장으로 나를 천거한 건 김용환 전 장관이었다. 그는 비대위원장을 지내며 DJ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다. 2월 초부터 “재경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게도 “그럴 경우 차관으로 들어와서 나를 도와줘야 할 거네”라고 말했다. 나는 “이한구(현 한나라당 의원)를 공정거래위원장에 쓰면 어떠냐”고 했지만 김 장관은 “(자신과) 동서지간이라 안 된다”며 한마디로 잘랐다. 김 장관은 자기 대신 네 명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고 한다. 재정경제부 장관 이규성. 기획예산처 장관 진념. 금융감독위원장 이헌재. 그 쪽지에 적힌 세 명은 그대로 임명이 됐다. 김용환 장관의 입김이 그만큼 셌던 것이다.

    만난사람=이정재 경제부장
    정리=임미진 기자


    등장인물

    ▶이윤재(61)

    사촌 동생.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행정고시를 거쳐 청와대 재정경제비서관까지 맡은 잘나가던 공무원이었다. 차관 승진을 앞두고 이유 없이 공직을 떠난다. 나중에 나와 함께 코레이(KorEI)라는 기업 전문 컨설팅 업체를 차려 대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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